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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이인재의 역사(임진왜란) 바라보기(21)조선 왕 원군 간청에 명 군사 개입… 첫 전투서 대패
이인재 아남항공 회장  |  ijlee@wba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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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5.30  19:2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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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인재 아남항공 회장

왕자들의 생포에 혈안이 되어 함경도 깊숙이 진군하던 가또오 기요마사는, 뜻밖에도 조선인의 제보와 협조로 별 힘들이지 않고 임해군과 순화군을 생포하기에 이른다. 조선 조정의 통치력이 잘 미치지 않는 여진족과의 국경지역에서 그들의 공격을 받고, 조선 영내에서는 의병들의 거센 공격을 받아 고전을 면치 못했으나, 두 왕자를 빼앗기지 않고 포로로 계속 잡아둘 수 있었다. <전회 요약>

 

한편 조선 국왕을 쫓아 개성으로부터 평양으로 진군한 고니시 유끼나가는 황해도를 거쳐 평안도에 진입, 6월13일 대동강에서 조선군을 격파하고, 15일에는 평양에 입성하였다. 그러나 조선 국왕은 이미 의주로 피난한 후였다. 이에 고니시 유끼나가는 무력한 조선 국왕의 추격보다, 목전의 대국 명 나라의 영토 침공이 큰 과제로 떠올랐다.

고니시는 이 상황을 한성의 총대장 우끼다 히데이에에게 보고, 승세를 몰아 2만 병력으로 압록강을 건너 명나라에 쳐들어갈 테니, 증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 상황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 우끼다로서는 부산의 모리 떼루모또의 재가없이 즉시 증원군을 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시일은 지체되고, 이런 상황을 감지한 고니시는 가신 겐소를 의주로 보내 조선 국왕에게 항복을 종용하였으나, 조선 국왕은 명나라 황제에게 또 사신을 보내 조속히 응원군을 보내줄 것을 간청하였다.

명나라 조정에서도 4월부터 왜군 동정을 파악은 하고 있었다. 그러나 즉각적인 군사 행동을 취할 형편이 되지 못했다. 첫째로, 그동안 일본이 조선과 제휴, 명나라를 침공하려 한다는 소문이 여러 경로로 명 조정에 전해져, 명에서도 그 진위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조선에서는 명에 한마디 통보도 없이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는가 하면, 사후 통보도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에서도 히데요시의 명나라 침공을 설마하는 자세로 받아들였고, 잘못 보고했다가 명으로부터 웃음꺼리가 되고, 일본으로부터 원망을 받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둘째로, 명 황제 신종의 국정 태만과 북방 몽골족의 변란 빈발로 인해, 조선 사태보다 자국의 내정 안정이 다급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단계에 접어들어, 조선 국왕으로부터의 상황 보고 및 원군 요청을 받고서는 더 이상 지체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7월, 명 조정은 요동 방위군의 조승훈을 총대장으로 하는 파병을 결정하였다. 이에 조승훈은 휘하의 사유산 장군 3천 병력을 평양 서부 안정관으로 진발시켰다. 그러나 고니시는 이를 탐지하고 한발 먼저 안정관으로 진격, 7월16일 명군을 공격해 이를 격파하였다. 사유산은 전사하고 잔여 병력은 요동으로 패퇴하였다.

평양으로 돌아온 고니시는 명나라의 참전을 직접 나고야의 도요또미 본진에 보고하고, 이시다 미쯔나리 등의 군사 6천명 증원과, 본토 대기 중이던 다떼 마사무네, 아사노 유끼나가 등의 현해탄 도해를 건의하였다.

한편, 패전한 명의 대장 조승훈은 일단 왜군과의 교섭을 위해 유격장군 심유경을 의주로 파견하였다. 심유경은 고니시와 코드가 맞는 책략가로서 8월30일, 평양에서 고니시와 만나 일단 50일간의 휴전 협정을 맺는데 성공하였다.

그 사이에 명나라에선 원군 파견을 준비, 송응창과 이여송을 대장으로 하는 10만 병력을 동원, 9월25일 북경을 출발하였다.

11월, 심유경은 평양에서 다시 고니시를 만났다. 그는 고니시를 향하여 “명나라 지원군이 요동에서 진을 치고 있다. 조선 왕자들을 돌려주고, 일본군은 한성으로부터 철퇴하라”고 협박했다. 이에 대하여 고니시는 “본국으로부터 지원군이 바다를 건너오고 있는 중이다” 라고 허세를 부리며, 철퇴 제안을 거부하였다.

고니시는 이때, 7월의 안정관 전투에서 명군을 격파시킨 여세를 몰아 압록강을 도강, 명나라 영토를 침공하지 못한 것을 크게 후회하였다. 시일이 갈수록 거듭되는 전투에서 병력 소모가 커지고, 익숙치 못한 엄동설한의 전투를 계속할 수밖에 없는 상황. 그러나 그러한 불리한 상황을 무릅쓰고 명나라 파견군과 한판 승부를 위한 준비 태세는 갖추어야만 했다.

1592년 12월25일. 명나라의 명장 이여송이 지휘하는 5만의 파견군이 드디어 압록강을 건너 조선 땅에 들어 왔다. 조선에서는 좌의정 류성룡이 이를 맞아 전황 설명을 했고, 이여송은 대포를 주무기로 하여 일본군을 격파하는 작전을 세우고 평양으로 향하였다.

당시 한성의 일본군 총대장 모리 히데모또는 이 소식을 듣자, 조선 각지의 일본군 장수들에게 긴급 소집을 명하였다. 명나라 대군을 포함, 명군의 응원에 용기를 얻어 조선 의병이 더욱 강화될 것에 대비해 일본군을 재편성하기 위한 조치였다.

함흥의 나베시마군이 제일 먼저 한성에 도착했다. 그러나 함경도의 다른 일본군 부대들은 동절기 북국의 대설에 갇히고, 의병들과의 전투에서 심각한 병력 손실을 당해 제때에 한성에 올수가 없었다.

다급해진 가또오 기요마사는 두 왕자를 안변에 남겨둔 채, 연락 두절된 휘하 부대의 구조를 위해 다시 길주 방면으로 진군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연도에 배치해둔 휘하 부대들은 하나같이 눈 덮인 광야에 고립되어 군량 부족과 동상, 의병의 공격으로 꼼짝달싹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가또오 기요마사가 구원군을 총동원, 갇혀 있던 휘하 부대를 하나씩 하나씩 구출하여 만신창이 상태로 겨우 한성에 도착한 것은 이듬해 2월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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